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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2024-12-31

한국의 서원 이야기 수집 – 채록본 발췌 (2024)

2024년 '한국의 서원 이야기 수집' 활동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9곳의 운영자(유사·도감 등)를 만나 구술을 채록한 기록집의 발췌본입니다. 각 서원 인근 대학과 고등학교 학생들이 채록자로 참여했습니다.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2019년 7월 6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제4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국의 서원' 9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한국의 서원'을 "한국의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자, 성리학 개념이 한국의 여건에 맞게 변화하는 역사적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인정된다"라고 평가했습니다. 대상은 영주 소수서원, 함양 남계서원, 경주 옥산서원, 안동 도산서원, 장성 필암서원, 달성 도동서원, 안동 병산서원, 정읍 무성서원, 논산 돈암서원입니다.

▍영주 소수서원 구술: 소수서원 도감 · 채록: 동양대학교 경찰행정학과

“소수서원에는 입원생의 자격은 소수서원의 경우 생원, 진사를 원칙으로 하였으나 향학열이 높고 행실이 올바른 사람도 입원 자격을 주었어요. 조선시대는 양반제도가 있어서 상민은 입학 자격을 안 주었어요. 전국적으로 소수서원에 와서 공부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지역적으로 보면 영남 쪽이 제일 많았죠.”

“행사에 참여하는 분들은 주로 인근 28개 문중에서 오세요. 예전에는 각 문중에서 한 분씩만 뽑아서 참여했어요. 그래서 한 문중에서 세 명, 네 명이 들어오는 게 아니라, 문중별로 출문을 내고, 보통 20명 정도 모아서 춘추 향사를 지냈죠. 그런데 지금은 영주나 봉화 등 다른 지역에서도 서원을 방문해요. 예전에는 주로 어른들이 참여하셨고, 그분들에게 사전에 연락해서 3월과 9월에 열리는 춘추 향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안내합니다. 다른 서원들은 보통 20명에서 30명 정도로 적은 인원으로 향사를 지내지만, 우리 서원은 많은 사람이 참여해서 때로는 100명 가까이 모이기도 합니다.”

“서원 운영비는 시에서 지원받고 있어요. 매년 약 5백만 원 정도의 보조금을 받고, 영주시청에서 임대료(육천오백만 원)를 받아 비용을 충당합니다. 향사나 춘추 향사 같은 행사도 이 비용으로 진행돼요. 또한 유림분들이나 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매년 50~60회 정도 교육을 진행하는데, 사마 과정이나 유림연수반 등을 운영합니다. 오늘도 유림연수반이 열려서 40명 정도가 참여해 수련하고 있어요. 이 연수는 1년에 15주 동안, 토요일 오후마다 한 번씩 진행돼요.”

▍함양 남계서원 구술: 남계서원 이사 · 채록: 대구과학대학교 간호학과

“남계서원을 짓기 시작한 이유는 당시 향교가 퇴폐적이고 출세주의에 빠져 진정한 학문을 탐구하지 않아서, 진지하게 공부하려는 뜻에서 서원을 세우기로 한 거예요. 그래서 서원을 지을 때는 그냥 아무 서원이나 짓는 게 아니라, 본받을 만한 훌륭한 롤모델을 찾아야 했어요. 이 롤모델은 단순히 지역의 유명한 인물이 아니라, 학문적인 태도나 사회적인 태도가 중요한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서원의 주된 목적은 좋은 인간성을 기르고 교육하는 데 있었죠. 오늘날처럼 물질주의에 빠져 정신적으로 무너진 사회에서, 유학 정신을 새롭게 가르치고, 인성이 좋아지면 세상이 더 나아질 거라고 믿었어요.”

“소수서원은 조선시대에 처음 세워졌고, 함양은 시골이지만 학문이 아주 발달한 곳이었어요. 신라시대 최치원이라는 사람이 함양에서 공부하는 문풍을 길러냈고, 그 덕분에 많은 인물이 나왔어요. 조선시대에는 김종직이라는 유학자가 군수로 와서 학생들에게 교육했고, 김종직은 학생들이 잘 따라오고 가르치는 재미도 있었기 때문에 함양에 남아서 교육을 계속했어요. 그가 군수로 있던 60개월 동안 많은 학생이 공부했고, 그중 30명이 과거에 급제하며 하나의 학파를 이뤘어요. 그래서 함양은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이 많았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소수서원처럼 서원을 만들자는 얘기가 나왔어요.”

“다른 서원들은 원래 사당부터 짓고 교육용 강당을 짓는 게 순서인데, 남계서원은 강당부터 지었어요. 교육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죠. 군수가 지원을 해줬지만, 군수의 부친상이 있고 함양에 큰 흉년이 들어서 지원이 끊기게 되었고, 공사가 중단되었어요. 그로 인해 많은 불평과 욕설이 있었고, 개암 강익 선생은 그 소리를 듣기 싫어서 지리산 마천으로 피신 갔어요. 이후 새로운 군수가 와서 선생의 학문과 후학에 대한 태도를 보고 다시 지원을 해줬고, 결국 강당과 사당까지 모두 지을 수 있었어요.”

▍경주 옥산서원 구술: 옥산서원 유사 · 채록: 동국대 경주캠퍼스 국어국문학과

“오늘날 우리나라가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큰 이유 중 하나는 선조들이 지금의 학부모들처럼 교육에 대한 열정입니다. 나라 발전의 근본인 교육을 서원이 그 역할을 하였습니다. 서원은 중국 당나라에서 발생하여 송나라 때 주자가 세운 백록동서원에서 처음으로 성리학으로 체계화되어 900여 년을 이어 왔는데, 1966년 모택동의 공산당 홍위병이 전통문화를 ‘봉건적 잔재’ 즉, 4대 구습. 옛 사상, 옛 문화, 옛 풍습, 옛 관행으로 규정하여 5000년 중국 문화를 모두 파괴하였죠. 이때 중국의 서원도 흔적 없이 사라졌어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9개 서원의 건립 순서는 한국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 (1543년)이 첫째이고 두 번째는 남계서원이고, 세 번째 옥산서원입니다. 1572년 화재 선생 사후 19년에 경주부윤 이제민, 권덕린 등 13인의 경주 유림들의 건의를 받아 경상 감사에게 보고하자 감사 임열이 예조에 상청하여 화재 선생이 건립한 독락당 아래 세웠습니다.”

“그 질문은 서원 입장에서 답하기 어려운 질문인데, 서원이 향촌 사회에서 역할을 했다면, 나라에 정치적으로 큰 사건이 일어났거나, 천재지변이 있을 때, 주로 지역의 여론을 수렴하고 선도하여 민심을 수습하는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경제적인 역할은 사실 거의 없었어요. 예로 들면 사찰은 신도들이 공양해서 돈이 들어오고 그걸로 자선 사업도 할 수 있었지만, 서원은 그런 경제적인 지원이 없었습니다. 서원은 오직 선비 교육을 위한 교육비와 제사 향사 비용만 겨우 충당할 정도의 논이 있어요. 그래서 서원이 경제적으로 지역사회에 기여했다고 보기는 어려워요.”

▍안동 도산서원 구술: 도산서원 전 별유사 · 채록: 안동대학교 사학과

“도산서원은 1575년 퇴계 이황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계승하고 연구하며 실천하기 위하여 창설하였어요. 퇴계 선생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 유학자라는 것 학생들도 다 알고 있죠? 그리고 퇴계 선생 제자인 월천공 조목 선생을 종향으로 모셨습니다. 이분은 15살부터 선생의 가르침을 받으며 가장 가깝게 모셨고, 도산서원 창설, 문집간행 등 선생의 현창사업을 주도하셨습니다.”

“도산서원은 건축물 구성면으로 볼 때 크게 도산서당과 이를 아우르는 도산서원으로 구분되는데, 도산서당은 퇴계 선생이 몸소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고, 도산서원은 퇴계 선생 서세 후 건립되었습니다. 도산서당은 명종 16년인 1561년에 설립되었는데 퇴계 선생이 낙향 후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을 위해 지었으며, 서원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퇴계 선생이 직접 설계하였다고 해요. 도산서원은 제향공간인 사당과 전사청, 강학공간인 강당과 동․서재가 퇴계 선생 서세 후 5년 뒤인 1575년에 완공되었어요. 부속건물인 장판각, 고직사, 서고는 필요에 따라 점차 증축했습니다.”

“제향 인물에 대한 추모행사로 봄과 가을에 향사를 봉행하고, 음력으로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아침 해 뜨는 시간에 사당에 분향 알묘를 하고 사당 내외의 이상 유무를 살피는 의식이 있으며 수시로 서원과 제향 인물과 관련된 일들이 생기면 그 사실을 아뢰는 의식이 있고, 방문하는 선비들이 알묘하는 의식도 있습니다.”

▍장성 필암서원 구술: 필암서원 전 도유사 · 채록: 장성 지역 고등학생

“필암서원은 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하서 김인후 선생과 그의 문인인 고암 양자징을 모신 서원이에요. 김인후 선생은 조선시대 호남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인데, 어릴 때부터 시문에 뛰어난 자질을 보여 5~6세 무렵부터 전라도 일대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고 해요. 10세 때 소학을 익혔고, 스무 살에 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게 되는데 이때 9년 연상의 퇴계 이황 선생을 만나 돈독한 교우 관계를 맺고 함께 학문을 닦았어요.”

“그런 셈이죠. 당시는 학문을 닦는데 나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학문의 깊이가 더 중요했으니 김인후 선생의 학문이 뛰어나다고 볼 수 있죠. 영남에 퇴계가 있다면 호남에 하서가 있다고 할 정도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유학자예요. 필암서원은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 30년 후인 1590년에 전라도 관찰사 윤두수가 발의하고, 정철을 비롯한 호남의 서인들이 협력해서 세운 곳이에요. 그 후 1624년에 중건될 때 추담 김우급이 쓴 상량문에 따르면, 윤두수가 처음 서원을 세우자고 했고, 정철이 이를 인정했다고 해요.”

“1597년 정유재란 때 왜적이 침입하면서 필암서원이 완전히 불타버렸어요. 그 후 1624년에 서원을 다시 만들기로 하여, 옛 자리가 있던 장성 기산리에서 황룡면 필암리 증산동으로 옮겨졌습니다. 1659년에는 '필암'이라는 이름을 받았는데, 이 이름은 송병선이 쓴 묘정비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 거예요. 하서 선생의 고향인 맥동에는 붓처럼 뾰족한 바위가 있어서 그 이름을 따서 ‘필암’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맥동 입구에 있는 큰 바위 뒷면에 ‘필암’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요.”

▍달성 도동서원 구술: 도동서원 재무유사 · 채록: 경북대학교 한문학과

“소학은 우리가 어릴 때 6세만 되면 한자를 읽는다고 하거든요. 소학은 6권으로 되어 있는데 일상생활의 예의범절, 수양을 위한 격언, 충신·효자의 사적 등을 모아 놓았는데, 그 속에서 사람이 태어나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다 적혀 있기 때문에 인생에 도움이 되는 책이에요.”

“우리 장판각에 지금 소장품은 없고요. 2007년 우리 서원의 자료 126점을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했습니다. 소중한 유산들을 서원에서 계속 관리하고 보존하기가 어려우니 전문 인력과 시설이 있는 곳으로 위탁관리 했어요. 참고로 고서류 8종 24책과, 경헌록 등 목판 8종 68점과 사액을 받을 때 국가에서 받은 제기 종류 33점을 기탁했어요.”

“아 정말 치밀하게 조사했네요. (웃음) 계단이 64개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을 보니까 … 정확하게 잘 모르는데 아마도 주역의 64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보입니다. 주역의 64괘에는 천지만물의 변화 원리가 투영되어 있다고 하는데 나도 이 부분은 조금 더 알아보아야 할 것 같아요.”

▍안동 병산서원 구술: 병산서원 유사 · 채록: 안동대학교 사학과

“학생들 반가워요. 사학과 학생들이니까 역사적인 이야기를 많이 배웠을 거 같아 오늘 이야기는 잘 통할 거 같네요. 병산서원의 역사적 의미는 정말 방대하지만, 우선 서원이 가진 기능을 살펴보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서원은 크게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어요. 하나는 교육적인 기능, 다른 하나는 제향 기능이죠. 국가가 하는 교육은 공적인 교육이라면, 병산서원은 사적인 교육의 역할을 해요. 제향은 주로 류성룡 선생을 모시는 데 집중돼 있죠. 우리 서원의 경우 1947년에 병산교육재단을 설립하고, 그 후 풍산중학교와 풍산고등학교로 이어져 오고 있어요.”

“조선시대의 교육 기능이 현대까지 이어진 유일한 사례가 바로 병산서원이에요. 지금 병산서원에서는 인성교육이나 예절교육, 또 충효 교육을 하고 있죠. 특히 류성룡 선생님의 충효 정신을 이어받아 충효 교육을 진행하고 있어요. 물론 조선시대처럼 교육할 수 있는 여건이나 시대적 배경은 아니지만, 그 정신은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우리 해군이 보유한 이지스함 중 세 번째 건조한 함이 ‘서애 류성룡함’이에요.”

“조선시대는 유생들이 교육을 받았지만, 지금은 그 역할이 없어요. 대신 저 같은 사람들이 서원의 교육이나 안내를 해주고 있는 거죠. 조선시대 유림과는 또 다르겠죠. 그리고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중국의 서원과 한국의 서원이 다르다는 거예요. 물론 중국의 서원이 한국 서원의 기원이긴 하지만, 차이가 있어요. 중국의 서원은 주로 과거제도에 집중돼 있어요. 예를 들어 백록동서원에 가면, 입구에 큰 비석이 있는데, 그곳에 과거 급제한 인물들에 대해 자랑하고 있어요. 반면 우리나라 서원은 그런 식으로 과거 급제한 인물을 자랑하는 법이 없어요. 대신 성리학을 가르치는 곳이에요.”

▍정읍 무성서원 구술: 무성서원 별유사 · 채록: 정읍 지역 고등학생

“무성서원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서원 중 규모가 작고 소박한 서원입니다. 특히 마을 중심부에 있어 마을과 이웃하는 서원이죠. 이런 특징 때문에 서원에 위패를 모시고 기리는 인물들도 독특합니다. 무성서원은 1615년 지역의 유림들이 통일신라 시대의 학자이자 관료인 최치원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성리학 교육시설이에요. 최치원이 태산의 태수일 때 생사당으로 세웠습니다. 태산은 정읍의 옛 지명이고, 태수는 지금으로 말하면 군수지요. 생사당은 백성들이 공적이 많은 사람이 살아 있을 때 받들어 모시기 위하여 지은 사당을 말합니다.”

“원래 한학을 좋아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한자 교육도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옛것을 좋아하고 역사에 심취했어요. 그러던 중 태산선비문화사료관에 관장으로 오게 되었답니다. 무성서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게 되었고요. 아제르바이잔까지 가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까지 10년이란 시간이 걸렸는데 자부심으로 우리 서원을 지켜가고 있어요.”

“저것은 비각이라고 해요. 비각에 있는 비에는 서원을 위해 도움을 주었던 분들을 잊지 않도록 기록해 놓았어요. 무성서원이 불이 나서 학교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서원에서 자체적으로 복원할 능력이 없을 때 다행히 외부에서 재정지원을 해줘서 서원을 중수했거든요. 그때 도와주었던 분들과 또 서원의 발전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셨던 분들의 공적을 비석에 새겨놓았어요. 그런데 비석이 비바람을 맞으면 퇴색되기 때문에 오래오래 기록을 유지하기 위해 비석에 집을 만들어 놓은 거예요.”

▍논산 돈암서원 구술: 돈암서원 유사 · 채록: 나사렛대·대전대 학생

“돈암서원에서는 유림 회원이 되려면 먼저 서원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해요. 그리고 그 가르침을 내가 정말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을지 판단해야죠. 또, 돈암서원에 몸담으려면 시간적, 심적 여유가 있어야 해요. 봉사 정신도 없으면 힘들고, 많은 고생을 할 수밖에 없어요. 그걸 극복하려면 내 마음을 순화해야 해서, 쉽지 않죠. 그래서 결국 중요한 건, 돈암서원의 핵심 가르침을 이해하고 내가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지 판단한 후, 유림의 일원으로서 할 수 있는 길을 찾아가는 게 맞는다고 생각해요.”

“돈암서원은 오랫동안 모든 의례에 남자들만 참여해왔어요. 여자는 아예 참여할 수 없었죠. 그런데 이제는 그런 전통도 바뀌어야 할 시점이 왔어요. 왜냐면, 현대는 남녀평등 한 사회로 남녀의 지위를 차별하지 않는 사회로 변화되었으니까 서원의 제례 의식에도 여성들의 참여가 필요합니다. 사실 그동안 서원을 운영했던 분들은 옛날 공부를 하고 전통적인 의식을 중요시했던 분들이에요. 그런데 그분들이 나이가 많이 들어서 한분 두분 돌아가시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전통 의례를 아는 분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답니다.”

“앞으로 이런 전통을 계속 이어가려면, 젊은 세대가 참여해야 하는데 남녀 성별을 구별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우리가 지금 고민하는 건, 이 서원을 어떻게 젊은 사람들로 채워나갈 수 있을까 하는 거예요. 나이가 좀 더 어린 사람들로 교체하고, 그들에게 하나씩 책임감을 느낄 수 있는 직책을 만들어 주려고 해요.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젊은 사람들이 참여하게 되고, 서원도 계속해서 이어갈 수 있을 거로 생각해요. 그런 방향으로 지금 많이 노력하고 있고,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고 있습니다.”